유다복음서와 부활절 보도비교
최근에 소위 유다복음서 내용 발표에 대한 것이 언론에 빈번하게 보도되었다. 부활절을 앞둔 4월 첫 주인 4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한 이 내용은 14일까지 연속 2주간에 걸쳐 각 중앙일간지에서 골고루 다루었다. 이는 미국의 지오그래픽지(紙)가 지난 9일 그 내용을 발표한 것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유다복음서가 관심을 끄는 것은, 지난 1,700년 동안 소문으로만 나돌았던 자료가 정말로 발견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동안 정통 기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 들어 있어서, 기존의 기독교 교리를 뒤집는 파괴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언론 특유의 기대심리(?)가 작용한 듯하다.
사실 요즘 기독교는 유다복음서 이전에, 다빈치 코드라는 허구 소설로 인하여 사회적 상관관계에 있어 시험대에 오른 적이 있다. 영화상영에 문제를 제기해도 비난을 받고, 침묵을 해도 비판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다 유다복음서가 공개되고, 이를 기회로 일부 언론의 기독교에 대한 시험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3번에 걸쳐 이 내용을 보도했던 한국일보는 7일자에서 이집트 「와타니」라는 잡지의 편집자 유세프 시드홈의 말을 인용하여 ‘예언의 완성에 있어 유다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역시 3번이나 보도한 한겨레는 10일자에서 ‘부활절을 앞두고 배신자 가룟 유다가 예수의 동지로 부활하게 될지 논쟁이 뜨거워질 전망이다’라는 다소 엉뚱한 논리를 펴며, 유다복음서의 진정성을 인정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 여러 번을 보도한 매일경제는 8일자에서 ‘유다복음서를 4월에 공개한 것은 부활절과 다빈치 코드의 상영을 계기로 기독교 신앙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려 있는 것에 맞춘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기독교 반응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4일자에서 ‘기독교의 중추를 이루는 교리와는 철저히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보도하고 있고, 5일자에서도 성서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기독교의 역사를 바꿀만한 내용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어 보도하고 있어 대조적이다.
각각 1번씩 보도한 언론으로는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이다. 서울신문은 8일자에서 유다복음 주석서를 쓴 로돌프 카서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예수는 자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적보다는 친구를 고른 것’이라는 표현으로 유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을 차용하고 있다.
경향신문도 비슷한 ‘기존 4대 복음과 달리 예수의 요구에 의해 예수를 배반한 것으로 기술돼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는 말로 유다복음서가 기존 4복음서에 없는 파격적 내용을 담고 있고, 이에 대하여 호의적 반응을 드러내고 있다.
동아일보는 ‘예수의 요구로 배반’이라는 제목으로, 유다복음서 공개 사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중앙일보는 ‘유다복음서는 부활 등의 언급이 없고, 정통성서에 반(反)해 파문 예고’라는 제목으로 정통기독교의 입장에서 사실보도하고 있다.
한편 국민일보는 여러 차례, 전문가들을 통해서 유다복음서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한 바 있다.
이렇게 정통교리와는 맞지 않는 위서(僞書) 유다복음서에 대하여 언론들은 지나치게 호기심을 보여 왔다. 그런데 4월 16일 부활절을 맞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보도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살펴보면, 한국기독교에 대한 언론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일보는 1면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대하여 사진만 보도하였다. 16면에서는 교황의 첫 부활절 메시지를 보도하고 있을 뿐이다. 한겨레는 10면에서 ‘부활절 진보․보수 연합예배’라는 제목과 사진만으로 보도하고 있다.
매일경제는 1면에서 교황의 부활절 미사 장면을 사진으로만 보도 하고 있다. 서울신문도 역시 7면에서 부활절 연합예배 장면을 사진으로 처리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8면에서 기독교의 부활절 예배를 사진보도하고, 11면에서는 교황의 부활절 미사를 사진으로 보도하고 있다.
반면에 동아일보는 A14면과 A18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의 부활절 행사를 비교적 크게 보도하고 있다. 그 외에 조선일보는 A1면과 A17면을 할애하여 기독교와 천주교의 부활절 예배모습을 보다 크게 다루고 있다. 중앙일보는 1면과 15면에서 각각 천주교와 기독교의 부활절 예배 모습을 전하고 있다. 그 밖에도 문화일보는 27면에서 기독교 연합예배와 천주교 정 추기경의 미사모습을 비교적 크게 보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 가운데 하나인 부활절 행사가 유다복음서라는 위서와 경중으로 따져 보았을 때,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것의 해답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복음서 관련 보도와 부활절 관련 보도를 비교했을 때, 크기나 지면분포로 보아서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다복음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오래되었던, 그 내용이 파격적이었던간에 그것은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수없이 있어 왔던 허황된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보도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과도한 호기심과 경쟁에 가까운 과잉보도를 하는 언론이, 정작 기독교의 부활절과 같은 중요행사는 단편에 가깝게 보도하는 것은 사회적 호기심과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뒤바꾸는 얄팍한 보도태도로 보인다.
유다복음서가 가지는 의미는 단지 오래된 파피루스 몇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지난 12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빛으로 소금으로 양심으로 일궈온 터전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가 위서(僞書) 몇 조각과 비견될 정도로 비중이 낮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