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적 오락성이여, 경박함을 멈춰라
- 개그콘서트 패러디 유감 -
“개그콘서트”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그동안 안방에 웃음을 선사하였던 오락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다. 젊은 개그맨들이 신선한 소재로, 기대하지 못했던 패러디로 관객과 시청자들의 가슴에 파격적인 감동의 파장을 일으킨 것만은 확실하였다.
반면에 개그콘서트가 웃음을 자아내게 하다 무리수를 둔 일도 없지 않았다. 때로는 선정성이 두드러지고, 때로는 인권침해적인 요소도 있었고(여성 비하, 지나친 바보 흉내 등), 외모지상주의에 치우쳐 소위 ‘얼꽝’을 웃음거리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소재의 빈곤에서 빚어지는 결과일 수도 있고, 아이디어의 고갈이 가져온 결과일 수도 있다. 여하튼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웃음을 창작한다는 일은 그만큼 고된 작업이리라. 그러나 코미디에도 넘어설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넘어서는 안될 영역이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최근까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거론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예를 든다면 영화에서 노출과 폭력에 대한 수위가 어디까지 가능한가가 그것이다. 과연 어디까지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수용할 것인가가 토론의 내용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모두 보장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류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완전 자유를 주장하는 입장이고, 표현의 자유도 사회 각 계층의 도덕, 윤리적 합의가 인정하는 범위를 무리하게 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활용되는 패러디는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이 질문 또한 영화나 예술 분야에서와 같이 표현의 자유에 속한 문제로서 그 해법이 만만치 않다고 본다. 하지만 패러디가 종교적 신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때 토의를 진행하는 방향은 또 달라진다고 본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어느 회사 홍보물이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것이 발표되었었다. 가톨릭계에서는 기독교의 성(聖)스러운 장면을 상업적으로 패러디 하였다 하여, 사용금지 가처분소송을 내었고, 이 소송이 받아들여져 홍보물이 대중매체에 등장할 수 없었다.
시각을 종교적 교리와 정서에 대한 패러디로 옮겨가 보자. 얼마전부터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이라는 코너에 일명 뚱뚱교 교주가 등장한다. 시대적으로 다이어트와 몸짱이라는 유행에 저항하여 잘 먹고 살찐 것이 왜 천대시 되느냐 하는 문제를 패러디 한 코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패러디의 수위에 관한 질문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 부분에 이르면 그 내용이 기독교적인 소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수난(고난 받으시고...), 부활(~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성경 구절(00장 00절) 등을 패러디한 부분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라도 그런 장면과 어법이 기독교를 패러디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는 이유는 종교적으로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용과 장면을 단순한 웃음거리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패러디에서 희화는 생명이다. 하지만 패러디가 모든 것을 희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만약 패러디가 자체 절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여과되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은 언어의 유희를 지나 잔인한 폭력이다. 이 코너가 노리는 패러디 효과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고 본다. 계속 의미없는 말장난으로 일관하므로 종교적 경건성을 폄하, 무시하고, 그 내용을 단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설정은 종말론적 놀이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 결과는 그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이나 웃는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인 자기비하, 자기모멸로 되돌아온다.
웃음에도 정당한 동기 유발이 있어야 하고, 타당한 감성의 자극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경외스런 내용을 단지 웃음으로 환치해 버리는 그런 작품은 그 자체가 경박한 인간성을 스스로 드러낼 뿐이다. 결국 우습지 않은 상황에서 우습지 않은 소재로 함께 웃으려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비웃는 모멸의 상황으로 급전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호이징하는 그의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이다(Homo Ludens)라는 견해를 체계있는 논리와 분석으로 갈파해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렇다. 인간은 심지어 종교적 영역에서도 본래적인 놀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런 견지에서 개그콘서트는 좋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생활에서 웃음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웃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몇 코너, 특히 ‘뚱뚱교’의 이름으로 발설하는 문장은 놀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웃음 때문에 오히려 본질을 망각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차제에 패러디로 먹고 사는 개그물이 한번 심각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특정 종교의 가치관, 어법, 정서를 웃음거리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락이라고 해서 모든 대상을 오락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인간의 종말을 역설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종말적 오락성을 반성하고, 우리의 경박스러운 웃음이 어디까지 왔는가 그 위상을 다시 한번 뒤돌아 봐야할 때이다.
이 글은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추태화 교수가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