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대부흥 100주년의 의미와 한국교회의 다짐
올해는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로 각 교단과 교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한국교회사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뿌리를 막 내리기 시작한 한국교회가 한국 땅에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교회의 정체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기 전, 우리 땅은 복음이 들어온 지 불과 20여 년밖에 안된 시점이었고, 불교와 유교가 1,500년 이상을 지배해온 척박한 땅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또 당시 열강들의 각축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즉, 1894년의 청․일 전쟁,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의 을사조약, 1907년의 고종의 퇴위 등으로 백성들의 희망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 한반도에서는 1903년부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미개와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교회가 새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교회가 사회의 희망으로 자리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우리 민족에게 주신 것이다.
한국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당시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바람과도 한 축을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의 미국의 무디부흥운동에서부터, 1904년의 웨일즈부흥운동, 호주부흥운동, 1905년의 인도부흥운동, 1906년의 오순절 부흥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부흥은‘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일어난다. 평양 대부흥운동도 1907년 사경회에서의 말씀으로 인한 자각과, 기도를 통한 회개가 성령 역사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사경회에서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토설(吐說)하며, 도둑질한 물건이나 돈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회개의 열매들을 맺었다.
그러면 당시의 평양 대부흥운동과 지금의 100주년 기념 대회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 교회가 새로운 부흥을 염원하고, 그 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100주년’이라는 지나친 숫자적 의미 부여는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진정의 회개에 있다. 따라서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도 한국교회가 말씀에 따라 진정으로 회개하면 성령의 역사는 일어난다고 믿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평양 부흥운동을 ‘과연 비정치화 현상이었나?’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당시의 정치적 상황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한 것도 사실이지만,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늘의 상황들도 어떤 조건이나 이유를 달고, 외형적 행사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령의 역사는 인위적으로 성령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한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개인과 교회와 사회 속에 비춰진 모습을 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현재 분명히 위기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외형적인 회개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어서’ 위기다. 교인의 숫자가 줄어서 위기가 아니라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어서’ 위기다. 기도가 적어서 위기가 아니라 ‘가슴을 찢는 회개가 없어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양 대부흥 100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과거를 자랑하고 모양만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의미를 바로 세우고, 말씀과 회개를 통한 열매가 있는, 진정한 대부흥을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