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논평]한 소시민 가족의 성공투쟁기, 어떤 블랙 코미디
- 영화 ‘괴 물’
추태화 교수 (안양대 교수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괴물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에게 괴물이란 단어는 낯설다. 너무 낯설어서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대상 일순위에 꼽힐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괴물은 혐오대상이면서도 인간과 함께 존재해 왔다. 물론 현실에서 괴물을 만나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는 괴물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괴물은 한마디로 여러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다.
첫 번째 유형은 기괴한 동물들이다. 괴물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는 이 부류는 예를 들면 통나무 집을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킹콩이나 고질라, 잔인한 공격성의 아나콘다, 심해에 숨어있는 무시무시한 문어, 날카로운 이빨의 식인 상어, 눈 덮인 산에 산다는 설인, 아니면 사람과 늑대를 오가는 늑대인간 등이다. 이 괴물 종류는 에니메이션의 도움으로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을 띄기도 했는데 “미녀와 야수”에 등장하는 야수는 마법에 걸려 잠시 기괴한 모습을 한 멋진 왕자이기도 했다.
두 번째 유형은 시각적으로 흉물스럽고 보기에도 섬찟한 모습의 괴물이다. 동서양의 신화나 전설 등에 등장하는 이 괴물들은 상상력의 옷을 입고 더욱 극대화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도록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경우가 많다. 용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성경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도 그렇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괴물은 공상과학(SF)영화에서 특수효과 덕분에 엄청나게 진화했다. 무섭고 잔인한 에어리언,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용가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E.T같은 귀엽고 작은 괴물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유형은 위에서 예를 든 정반대의 수사학으로 포장되어 있다. “괴물같은 사람”이란 감탄문이 그것이다. 이 말은 분명 상대방에 대한 찬사이다. 더 이상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을 괴물 같다고 한다. 괴물이란 표현에는 일종의 부러움도 스며있다. 이 경우 괴물은 메타포이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어떤 영화라고 해야할까.
미국을 다시 생각한다
영화 괴물은 괴물의 비정상적인 탄생이 암시되고 있다. 스토리는 주한 미군 소속 어느 실험실에서 몰래 버려진 독극물이 물고기의 유전자를 변형시켰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미군 장교는 포름알데히드를 강제로 폐기시키라고 명령한다. 한국인 관계자는 그 독극물이 서울 시민곁에 흘러가는 한강으로 들어간다고 경악한다. 미군은 명령한다. 명령에 따라 독극물은 하수도관을 타고 한강으로 방류된다.
미국은 여기서 어떤 나라로 비치는가. 독극물 폐기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지 않고 군대의 논리로 밀어부치는 제국이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에게 그렇게 권력을 사용해도 되는가. 그것은 폭력이요 인권 유린인 셈이다. 장교의 명령 하나로 주둔지의 고유한 인권을 무시하는 그런 파렴치한 제국으로 보인다.
나중에 알려지게 된 일이지만 괴물과 접촉된 사람에게서 방사선 노출이 전혀 없었는데도 자국에 유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사건을 고의적으로 왜곡한다. 결국 미국은 약소국을 지배하기 위해 방사선으로 위협하는 그런 이기적인 나라로 비쳐진다. 괴물은 반미(反美)를 외치려 하는가.
환경을 다시 생각한다
괴물은 초기에 낚시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아주 희귀한 모양이었던 것 같다. 낚시군의 망태기에 담긴 물고기는 보기에도 희안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갖다 주려는 마음이 들 정도였었다. 그 때는 이미 미군 기관에서 흘러나온 독극물로 인해 환경파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환경오염을 제기하는 환경단체의 시위 장면도 영화가 환경 문제를 거론하려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회를 다시 생각한다
영화는 잊을만 하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시니컬하게 앵글에 담는다. 예를 들면 한강에 투신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절규하는 말은 이렇다. “너희들은 저기 아래 시커먼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대꾸하는 사람이 “뭐가 보인다고 그래?” 하자,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예안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표출하며 물속으로 투신하고 만다.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선배를 통해 동생 현서의 핸드폰 발신지를 알아보려던 삼촌(박해일)은 현상 수배의 몸이지만 회사까지 따라간다. 선배는 그렇게 우정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믿었던 선배는 옆방에 체포조를 준비시켜놓았고, 거기서 포상금의 세금액을 묻는 둥 사람사는 모습이 시니컬해 보인다.
가족을 다시 생각한다
광대한 도시 서울, 무시무시한 괴물 앞에 등장한 가족은 소시민이다. 의외이다. 이 가족이 괴물과 직면하게 된 이유는 사랑스런 딸 현서가 괴물에게 유괴된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각기 유별난 삶을 살아온 이들이 가족의 납치를 통해 다시 결속된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또한 각자가 살아온 삶의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변희봉)는 헌신적인 가부장의 역할을 다하므로 가족을 살리려고 괴물에 정면도전하다 목숨을 잃는다. 아빠 강두(송강호) 역시 지극한 부성애로서, 삼촌, 막내(배두나)도 모두 조카가 살아있다고 믿으며, 현서를 찾기에 혼신을 다한다. 괴물 앞에서 겁과 공포에 질려 도망부터 갈 것 같은 이 가족이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하여 괴물을 무찌르게 되는 것은 정말 괴물같은 이야기이다.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군·경 병력이 대거 투입되지만 정작 그들이 하는 일은 방사선 오염이 의심되는 지역을 통제할 뿐이다. 또한 환경단체들의 데모를 진압하는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괴물의 정체를 파악한 뒤에는 적극적인 대처를 했어야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괴물을 물리친 것은 희생자 가족 중에서 어쩌면 가장 소시민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괴물을 블랙 코미디로 보게 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이 점이다.
이겨보지 못한 자들을 위한 블랙 코미디
그렇다 영화는 한 마디로 블랙 코미디이다. 군인과 경찰이 중무장한 채 한강을 지켜도 괴물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의 삼엄한 통제를 받고 있는 지역으로 가족 4명이 잠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종횡무진 통제 지역을 누빈다. 군·경은 핫바지인가. 그들이 통제하는 작전 목적이 명확치 않다. 우스운 것은 나약한 가족이 차와 신용카드를 담보로 낡아빠진 구식 엽총같은 무기를 구입하고 양궁으로 무장하면서 괴물을 잡으려는 집념을 불태우는데, 현대식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군·경은 왜 통제만 하고 있을까. 군·경 기관을 아이러니컬하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가족에 집중하다 생긴 옥의 티인가. 그것도 아니면 군경이라는 제도권을 비판하려는 해체주의적 의도가 숨어있을까.
또 하나 블랙 코미디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괴물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현서 삼촌은 경찰에 쫓기다 부상을 입는다. 그는 그 충격으로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쯤되면 괴물 제거는 물 건너간 일이다. 그런데 그를 살려준 사람이 있다. 한강변에서 노숙하는 노숙자이다. 걸인에 가까워 보이는 이 사람이 삼촌을 보살펴 주므로 원기를 회복한다. 그리고 그들은 화염병을 제조한다. 군·경도 알아내지 못한 괴물의 약점, 바로 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도가 통한 도인들처럼 괴물의 약점을 바로 알아챘다. 군·경이 갖고 있는 최첨단 수색장비, 전투장비가 갑자기 안쓰러워진다. 원시적 무기를 어렵게 마련한 소시민들이 초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군·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괴물에 정면 도전한다.
괴물에게 다가가는 박해일씨, 화염병을 던지고 방아쇠를 당기지만 탄환이 떨어졌음을 알고 당황한다. 죽음 직전에서 관객은 웃음이 터진다. 그 때 다리 난간에서 휘발유를 괴물에게 쏟아 붓는 노숙자. 군경은 환경단체 시위를 진압하느라 엉뚱한 데 전력을 허비하고 있는데 외롭고 외로운 노숙자 그 분이 나타나 괴물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그 즈음되면 노숙자는 거의 구세주 같아 보인다. 아니면 강물을 벗삼아 우주의 도를 통달한 도인이었던가. 막내는 양궁에 불을 붙여 괴물을 정조준한다. 괴물은 화염에 휩싸인다. 종말을 고해가는 괴물, 그런데 여기에 아버지는 딸에 대한 복수의 치명타를 가한다. 괴물의 아가리에 쇠봉을 박는 것이다. 괴물의 몸집에도 전혀 밀려나지 않는 송강호씨, 그의 괴물같은 힘이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반칙왕의 그 괴력이 부활한 것은 아니었는지.
세상에서 한번도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던 자들, 우리는 그들을 소시민들이라 부른다. 다름아닌 우리 자신들이다. 실패를 밥 먹듯 했고, 성공은 남의 집 이야기였다. 소망이 있다면 뭔가 한번 이겨 보고 싶었다. 그런데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배달해 주어야하는 오징어 뒷다리를 몰래 뜯어먹는 강두, 하지만 그를 둘러싼 소시민 가족은 그렇게 약한 팀이 아니었다.
괴물은 그들의 사랑의 응집력을 시험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더 잃을 것이 없는 가족, 게다가 그렇게 사랑하던 식구를 납치한 괴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소시민은 분연히 일어났다. 소시민이 드림팀으로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괴물은 미국을, 환경오염을, 현대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무거운 주제를 한 편의 영화에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괴물을 빙자한 악세사리일 뿐이다. 영화가 그런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루었다면 아마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제가 너무 드러난 사상 영화같이 졸음을 불렀을 것이다. 그리하여 코미디에 가까운 설정들이 괴물을 괴물스럽게 만든 것은 아닐까. 괴물스런 상상력이 나락에 떨어질 뻔한 영화를 구원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