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 선언에는 책임감이 있어야
우리 사회 분열상을 염려 한다
최근 대학가 교수들로부터 ‘시국 선언’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10일 현재 전국의 대학에서 3,000여 명의 교수들이 시국 선언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해외에서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 시국 선언이라는 것은 지난 3일 서울대 일부교수들과, 중앙대를 시작으로, 지방 대학과 법조계, 종교계, 학계까지 번지고 있다. 시국 선언의 발단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이 있다.
주된 내용들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지 말고, 소외 계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전직 대통령 문제와 관련 사과하고, 국민적 화합과 정치 세력 간 연대를 하고,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개선하라는 것 등이다.
교수들의 과거 시국선언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다. 1960년 전국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6년 910명의 교수들이 민주화 요구를 한 것, 1991년 명지대 강경대 군 사망 사건을 두고, 60개 대학 2,600명의 교수가 공안통치 종식과 반민주악법 개폐를 요구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하여 같은 대학 교수 사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6월 9일 68개 대학의 128명의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모임은 ‘일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반박성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대학 교수는 지성과 양심을 갖추고 균형감각을 가지고 시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하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부르짖던 지성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민주주의가 확실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수 사회가 마치 유행처럼 ‘시국선언’을 하는 것은 자칫하면 가벼움으로 보일 수 있다. 교수 사회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며, 양식을 갖춘 집단이다. 그렇기에 그 신중성이 요구된다. 시국선언에 동참한 교수들의 숫자가 역대 최다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시류에 편승한다는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
교수들의 시국 선언에서 ‘민주주의 실종’을 가장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 무엇이 민주주의의 실종이며, 무엇이 참다운 민주주의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과거 공안정국 시절에 있었던 신분상의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무거운 책무와 고뇌와 양심의 무게가 없는 시국선언은 지양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방종을 자유로 혼동하는 것으로 보이며, 말없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아니라 일부 단체의 막무가내식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이 무분별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대화와 타협은 없고 일방과 강요만 판치는 형국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도(正道)는 사라지고 변칙만 난무하는 모습이다.
또한 현재 우리 사회는 심각한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 북에 의한 일방적 협박으로 인하여 남과 북의 긴장고조는 물론이거니와, 동서간, 계층간, 세대간, 이념간에 갈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마당에 교수들의 ‘시국 선언’은 또 다른 분열을 조장할 수 있음에 매우 걱정된다.
이와 같은 심각한 국론 분열에 불을 지피고서, 대책 없이 즐기는 뻔뻔한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를 질식시켜 놓고서도, 서민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게다가 북한 정권에 의한 국가존망의 위협에 대하여는 왜 목소리를 아끼는 것인지, 오로지 정당의 손익계산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이야 말로 우리시대의 청산 대상이라고 본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들에게 있으면서도, 국민들에게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못하는 정치권에서는 희망을 논하기 어렵다. 이제 정치권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일에 무한한 책임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고 시대를 책임지는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하는 ‘편 가르기’보다는 통합과 화합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함께 해야 하느냐의 고민, 대한민국과 민족 공동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합의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종교계가 편승하는 현상이다. 지금으로서는 종교인들의 정치 편향적 발언은 우리 사회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일부 종교단체의 참여는 국민들 편에 서는 척 하면서 오히려 종파의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은 매우 부정직한 태도이다.
민주주의 발전은 어느 한 계층만의 노력이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특정 계층의 일방적 주장으로 견인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역할은 다하지 못하면서 남의 탓이나 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요소가 될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촉발된 ‘시국선언’이라는 것이 역사의 충분한 의무감이 될 수 없으며, 국민들을 충동시키고 분열시키는 남발성(濫發性)선언이 아니기를 바란다.